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기도, 아버지!
로마서 8장 14~15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어떠한 순간에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도, 깊은 묵상기도로도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 할때, 사도바울은 우리의 영에 유익하다라고 하였으므로, 마음에는 열매가 없는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묵상도 감정이 잘 다스려질 때는 깊은 은혜로 들어가도록 도와주지만, 감정이 격렬하거나,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기도가 전혀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되뇌이며 끝나버리는 시간이 되기도 하여 허탈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금식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요청하거나
받기도 합니다. 그럴때에 도움을 받아 나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는 기도 가운데 돌파가 되지 않고, 나의 감정과 생각에서 머무는 상태에 무언가를 하려하지 말고,
가장 먼저 우리가 교제하려고 하는 분이 "아버지"임을 기억하고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형식과 시간에 얽메여 있는 지도 모릅니다.
방언기도 얼마, 기도 얼마에 따라서 나의 신앙생활의 점수가 매겨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특정한 선포기도문과 기도문을 유창하게 하거나 , 힘있게 하는 것으로 오늘 나의 신앙의 본분을 다 한 것 같이
느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본질을 까먹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축사기도도, 예언도 있고 여러 형태의 기도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함으로 유익을 누릴 필요가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이며 가장 큰 유익을 주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까먹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형식을 벗어나 "살아있는 우리의 아버지, 사랑이신 아버지"와 교제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엔 아무런 형식 없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기도가 깊어지고, 내 내면에서 여러 소리가 올라오거나 감정이 올라올 때,
그 때 우리는 가면을 쓰지 않고, 아버지 앞에 솔직하게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어디계셨어요 아버지 너무 힘들어요 아버지 나 너무 죽고 싶어요. 아버지 너무 고통스러워요"
이 감정은 때로 어른이 된 우리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가야하고, 살아가기 위해 괜찮은 사람이다 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도 형식과, 순서를 벗어나서
살아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버지 라는 세 글자엔 강력한 은혜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때, 어느 사람에겐 눌려져있던 슬픔과 고통이,
어느 사람에겐 종교적 형식과 모습으로 눌러놓았던 온갖 분노와 혈기가 나올 것 입니다.
내 안에 눌러놓았던 진짜 나의 모습을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전에 종교로 치장했던 사실상 성취주의 은혜가 아닌 "진짜 은혜"를 누리게 되고
인격적인 관계를 아버지와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내일이 아닌, 조금 뒤가 아닌, 지금 바로 아버지를 부르는 기도를 시작해보십시요.
"아버지!" 라는 외침과 부르짖음 가운데 내게 임하셔서 나를 만지시는 성령님을 반드시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